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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35회 작성일 24-03-19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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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8운동
 
  약 반세기 전 학생, 지식인을 중심으로 벌어진 격렬한 시민운동을 새삼 회고해 본다. 격동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시대정신(Zeitgeist)이 드러난다 해도 이것이 반드시 40여년 전 독일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폭발적인 사회운동으로 표출되지는  않는다. 이런 혁명적 폭발성과 함께 사고의 패러다임 전환을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68혁명’의 의의는 오늘날까지 깊이 되새겨지고 있다. 초기에는 학생운동(Bewegung), 또는 학생폭동(Revolte)으로 불리던 이 운동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혁명’으로 불릴 만큼 독일사회에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68세대 혹은 단수로 ‘ein 68er’라고 불리던 운동참여자들은 어느덧 50대에 접어들었다. 이 운동이 갖는 특징 중 하나를 꼽는다면, 당시  미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각 나라마다 직접적인 계기와  전개과정은 다르지만 운동의 기본이념은 같은 뿌리를 지닌 것이었다.

  68운동의 동기

  2차 대전 이후 60년대 말까지 유럽 국가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힘입어 20년 간 물질적으로 전례 없는 번영을 이루었고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권력에 맞선 대규모 반항이 일어난 것은 전통과 가치에 대한 부정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기성세대는 두 번의 참혹한 세계대전을 치렀고 전후에는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경제발전을 이루는데  중추 역할을 한 세대인 반면, 풍요 속에서 성장한 전후 세대는 삶의 양식이나 정치, 문화의 변화를 갈구하면서 기성세대의  가치관이나 질서의식에 도전하였다. 물론 이들의 주장은 임금인상이나 계급 투쟁적 요구를 담지는 않았고, 물질적 요구가 아닌 삶의 질의 향상을 요구하면서 기존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거부하는 저항운동으로서 정치, 사회, 문화의 경직성에 반기를 들었다.
  무엇보다 이 대규모 사회운동의 이념적 지도자로는 Herbert Marcuse를 꼽을 수 있다. 1930년대 유대인 실업가의 지원으로 설립된 프랑크푸르트 대학 부설 ‘사회문제 연구소’에 소속되어 활동했던 그는 30년대에 나치를 피해 미국 캘리포니아로 망명하였다. 초창기인 30, 40년대부터 이 사회연구소는 산업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 비판(Ideologiekritik), 권위주의 연구 등을 통해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취하였고 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들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형태 비판으로 이어지면서 사회적 이상, 즉 유토피아로서의 자유, 평등이념 등을 현실사회에서  실현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특히 마르쿠제는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갖가지 병폐와 모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고도 산업사회의 위기, 산업사회에서의 인간 소외, 현존사회의 비판적 극복에 의한‘인간해방’등을 관심대상으로 삼았다. 모순과 착취가 없고 자유의 실현이 보장되는 사회를 지향하는 다분히 유토피아적인 그의 사상이 학생층에게 이념적인 견인력을 발휘했지만, 68년 학생운동이 폭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비판이론 자체는 일반의 큰 관심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 학생운동에 보다 직접적인 계기가 되고 영향을 끼친 것은 오히려 당시의 특수한 정치, 사회 상황이었다. 월남전을 벌이고 있던 미국에서는 참전을 거부하고 평화를 갈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져갔고  과거 사회규범에 반항하는 젊은 히피 층의 생활양식과 자유분방한  태도는 독일에서도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다. 때마침 독일 국내  정치적으로 기민당과 사민당의 대연정(grosse Koalition)으로 인해 야당이 제 기능을 못하는 공백상태가 발생하자 학생층을 중심으로  원외 야당(ausserparlamentarische Opposition APO)이라는 저항세력 형성에 박차를 가하였고 전후 세대 사이에서는 당시 독일사회  전 분야를 장악하고 있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의식이 고조되어  갔다. 이전 세대는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상당수가 히틀러  독재에 동조했으며, 이들은 히틀러가 저지른 미증유의 잔학행위에 대한  전후의 정신적인 청산작업을 거부해 왔다. 이런  상황은 60년대 말까지 독일 중고등학교의 역사교육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당시 교육청은 전체 교사들 중 상당수가 나치정권의 동조자였기에 이들 간에 있을 수 있는 감정대립을 피한다는 당치도 않은 이유를 들어 나치시대 역사를 교과과정에서 삭제하였다. 이 사례만 보아도 양식 있는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에 대해 극도의 불신을 품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처럼 빵의 문제를 원만히 해결한 데에  도취되지 않고 삶과 의식의 영역에서 과거를 탈피하여 새로운 가치관과 한층 질 높은 문화를 창출하려 하였다. 물질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율성, 개방성, 다원성,  개인의주체성이  따르지 못했다는 반성에 따른 것이었다.

  68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

  독일 내 68운동은 베를린,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등 전체 대학도시로 확산되어 갔다. 특히 베를린이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베를린시가 전승 4개국 통치하에 놓여  있어 이 도시에 거주하는 젊은이들은 군복무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정이나 국가에 대한 반항의식이 강한 학생들은 전국에서 베를린으로 몰려들었고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도 베를린에서 였다. 1967년 당시 독재자로 군림해 있던 이란  국왕 팔레비의 베를린 방문에 항의하는 반대 데모가 벌어졌는데 이 때 경찰의 총에 맞아 한 학생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학생들의 격렬한 반응과 폭넓은 의식화의 계기가 된 이  죽음이 없었던들 68운동은 훨씬 가볍게 지나갔을 지도 모른다. 반권위주의적 성격의 운동이 정치적 운동으로 전환되어가면서 전체 학생의 65%가 점차 정치의식화 되었다고 전해진다. 학생들의 주장은 반미, 월남전 반대, 보수언론 반대의 양상으로  나타났고 점차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 기성세대의 가치관,    규범, 도덕적 표상에 대한 거부 등 사회 전면에 깔려 있는  권위의식에 대한 반항운동으로서 정치적인 색깔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당시 학생들이 내건 슬로건에서 이 운동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대표적인 몇  가지를 보면 ‘Traue keinem ueber 30. (나이 30이 넘은 자를 신뢰하지 말라.)’, ‘Es ist verboten zu verbieten. (금지하는 것은 금지된다.)’, 좀 더 과격한 표어로는 ‘Macht kaputt, was Euch kaputtmacht. (너를 파괴하는 자를 분쇄하라.)’, ‘Es lebe Mao! (모택동 만세!)’라는 구호는 대학가 건물 구석구석을 장식하는 표어였다. 데모행진 시 학생들이 즐겨  사용한 구호로는 ‘USA SA SS!’와 ‘Ho-Ho-Ho-Chi-Min!’ 등이    있다. -SS, SA는 히틀러 정권하 만행에 참여한 특수부대이다- 당시 사회상과 68운동의 동향을 보면 일차적인 목표가 탈권위주의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1968년 함부르크대학에서는 전통 예복을 걸치고 엄숙히 거행되는 오랜 전통의 대학총장 취임식이 데모학생들에 의해 방해 받으면서 이 전통의식이 한갓 조롱거리가 되었다. 고등학교에서 조차도 교사들이 토대민주주의를 실천한다는 취지에서 학생들과 합의한 후에야 교과내용을 선택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교육의 기회균등이 평가의 기회균등까지 포함하는 중요한 실천목표가 됨에 따라 지식층 자녀들에게 평가상 불이익을 주어 균등사회를 이루려는 교사들의 과격한 양상도 나타났다. 대학 내의 일반 학생식당과 구분되어  있던 고급 교수식당이 폐쇄되어 더 이상 교수식당과 학생식당 간 구분이 없는 평등공간이 만들어졌다. 요즘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지만 68년 이전까지만 해도 파리의 에펠탑아래서 경찰의 눈을 피해서나 구할 수 있는 희귀품이었던 포르노잡지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함부르크에서 발행되는 포르노 잡지『St. Pauli』는 120만 부의 부수를 자랑할 정도였다. 대학 학과 내의 권위주의적인 연구소 소장제도가 없어지면서 정교수의 힘은 약화되고 학생과 중간층을 포함하는 3자 협의체(Drittelparitaet)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학생들 간에는 존댓말이 사라지고 ‘du’가 일상화되었다. 심지어 교수에게도 자극적으로 ‘du’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특히 사회과학부에서는 교수와 학생 간 존댓말이 사라졌다. Fremdbestimmung, Emanzipation, reflektieren, faschistoide Tendenzen, ins Bewusstsein heben, repressive Gewalt, autoritaere Struktur 등의 사회학 용어들이 학생층이 즐겨 구사하는 언어로 일상화되었다.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교육, 여권신장, 성 해방, 가정 내 구성원간의 역할, 일상 의복, 일상 언어 등 문화 전역에 이르는 변혁과 더불어 철저한 토대민주주의(Basisdemokratie)의 실현도 강력히 요구되었다. 한편 이 68운동은 격렬한 초기의 양상에 비하면 오히려 빠르게  진정되어갔다. 자본주의를 타도하겠다는 학생들의 강력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은 배부른 노동자층에게 까지 점화되지는 않았으며, 정부는 학생들의 요구에 응해 대학구조 개혁,  교육개혁 등을 추진함으로써 어느 정도 무마정책에 성공하였다. 이 당시의 전 국민적인 정치의식의 좌경화는 1960년 사민당 Willy Brandt의 집권을 가능케 했고, 곧이어 그는 공산권과의 화해정책(Versoehnungspolitik), 동방정책(Ostpolitik)을 끈기 있게 추진하였다. 이때 학생운동권 내부에서는 이념적인 분열과 함께 물리적인 가두투쟁으로부터 후퇴하는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사민당 노선에 흡수되어 갔고 일부는  탈권위교육(antiautoritaere Erziehung)을 표방하는 아동교육  유치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또한 상당수는 노동계급의 의식화를 위한 전략으로서 장기적으로 ‘기성제도 하에서의 긴 행진(langer Marsch durch die Institutionen)’이라는 길을 택하여  산업현장에서의 노동자 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또 다른 일부  극좌세력은 지하로 잠입(untertauchen)하여 적군파(Rote Armee Fraktion)를 조직, 테러리즘의 길을 택하였는데 이들은 98년  봄에야 자체 해산을 공표하였다. 당시는 경제가 번영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낙관적이던 때라 노동자층은 전혀 학생들에게  동조하지 않았고, 오히려 전단을 뿌리는 학생들에게 노골적인  반감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는 1천만 명이 참여하여 총파업을 벌였던 프랑스의 68운동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물론 프랑스에서도 노동자의 투쟁은 임금인상이나 계급의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68운동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일 큰 약점은 집약적인 조직의 부재였다. 구심점이 없는 정치운동으로서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학생들도 운동성과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각기 성향을  달리하는 여러 개의 공산당이 창설되고 약 10만 명의 온건파는 사민당에 입당했다. 1971년에는 전국적으로 392개의 극좌파 단체가 난립해 있었다. 학생들의 운동은 2년 간의 격동기를 거치고 난 후 8년여에 걸쳐 서서히 냉각되어 갔다.

  68운동에 대한 회고와 평가

  68운동이 독일 사회에 남긴 역사적 교훈과 오늘날까지 이 사회에 미치고 있는 구체적인 영향은 무엇일까? 이제 역사적인 안목에서 이를 긍정적으로 볼 것인가, 혹은 부정적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이에 대한 최종적인  해답은 명백하게 주어질 수 없을 것이다. 학생들이 지향하던 유토피아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들이 타파하려던 자본주의체제는 오늘날 동서 냉전체제의 붕괴와 함께 오히려 더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승리자로 군림하고 있다. 이 ‘68혁명’이 독일인의 사고방식, 생활양식을 전격적으로 바꿔놓은 것은 사실이다.  현재 이 세대의 상당수가 정부, 정당, 교육계 등 사회 전 분야에서 활약하면서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딱딱하고 융통성 없는 전형적인 ‘독일적인 것(Deutschtum)’을 거부하는 가운데 청바지, 미니스커트가 유행하게 되고, 부모들 세대의 생활감정보다 영국, 프랑스, 미국식의 새로운 다국적, 다문화적 생활감정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30년 전에는 기혼 부인은 남편의 서명 없이 은행구좌를 개설할 수도 없었고 여성의 사회진출은 제한되어 있었으며, 성폭행으로 임신한 경우에도 낙태는 금지되어 있었다. 오늘날에 비하면 마치 암흑기를 연상시킨다. 이제 고등학교 및 대학과정에서 여학생은 남학생과 동등한 비율이 되었고, 낙태문제는 거의 자유롭게 허용되었으며, 언어 면에서도 미혼, 기혼을 가르는 ‘양(Fraeulein)’이라는 단어가 생활 속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이렇게 내면적인 생활상의 변화와 더불어 권위주의 체제에 변화를 가져온 68운동이 유년기의 독일 민주주의 발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된 것은 사실이다. 좀 더 민주적이고 열린 사회로 진입하는 문호를 터놓은 것이다.
  68운동의 또 다른 성과로는 주로 68세대가 주축을 이루어 성장한 환경운동의 선도자인 녹색당의 창립을 들 수 있다.  집권경험은 없지만 이 정당은 국민들의 정치의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히는 관용의 자세 역시 68세대에 의해 결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이와 같이 가시적인 사회변혁을 유도했음에도 불구하고 68운동이 낳은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현 사회가 드러내는 부정적 사회상의 원인을 통틀어 68운동에서 찾고 있다. 68운동이 권위의식 해체에서는 극히 성공적이었으나  이를 대체할 새로운 가치관의 형성 및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권위의 형성에서는 무력했다는 지적이다. 즉 민주주의 사회에서 요구되는 대체가치관 형성에서 균형감을 잃었고, 일방적인 탈권위가 오히려 부정적인 측면을 키웠다. 연대의식이나 공동체에 대한 의무감을 약화시킨 이러한 경향에 대해 전 수상  슈미트는 68운동이 이 사회에 본질적인 도덕성의 결여를 유발했다고 주장했으며, 보수적인 한 언론인은 ‘68세대가 히틀러 정권보다 더 많은 가치관을 파괴했다.’고 까지 표현했다. 모든 사회악에 대한 책임을 68세대에게 돌리는 극단적인 주장이었다. 물론 운동권 내부에서도 68운동은 실패한 혁명이며 오히려 자본주의가 자기방어능력을 개선, 강화시켜왔다는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 권위주의를 거부한다면서 운동가들 자신이 권위의식에 젖은 행동을 일삼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기도 했다.  한편 80년대 들어 68운동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녹색당이  토대민주주의(Basisdemokrtie)를 현실정치에서 구현하고자 했지만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대혼란만 초래했다. 게다가 68세대는  자신들의 정치목적을 관철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민주적 규칙을 스스로 어겼다. 회의장에서 비행을 저지르는가 하면  결과 조작과 권위적인 행태 등 비민주적인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금 독일사회에서 가장 열띤 쟁점거리는 탈권위주의가 직접, 간접으로 교육에 미친 영향이다. 만약 2차 대전 이전 세대가 자율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와 판단 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면 나치정권과 같은 체제를 낳지는 않았으리라는 역사적 인식으로부터 사실상 탈권위 교육이68운동의  핵심적인 기본목표 중 하나였다. 그러나 탈권위와 더불어 전통가치 자체가 부정되면서 대안이 없는 공백상태에 빠졌고, 권위를 포기한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필요 이상의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이들 역시 방향감각을 잃고 학업에 대한 열의와 동기부여 자체를 지니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68세대는 가치질서를 파괴하고 말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할 자율적인 책임의식, 사회참여의식, 예절교육, 사회성,  인간존엄성의 존중, 종교 교육, 질서 의식 등 보수파에서 내세우는 교육의 목표 대신 68세대는 인간해방, 갈등에 대응하는 극복 능력, 자율적인 결정권 등을 중시한 교육이념을 추구한 결과였다. 학원 내 폭력이나 심지어 신나치들의 운동까지도 그 책임은 무질서를 방관하고 대체가치관을 심어주지 못한 68세대에게 전가되고 있다. 사회변혁을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교직을 택한 68세대가 이제 자신들의 산물인 권위를 부정하는 차세대에 의해 심한 불신을 받고 있는 현실 속에서, 오히려 요즘은 교사들이 다시 교육자로서의 권위를 되찾아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68혁명 참여인물의 그 후

  68세대는 적군파 테러리스트의 소멸을 마지막으로 모두가 기성사회에 동화 흡수된 셈이다. 이들은 교사, 법조인, 언론인, 교수, 정치가 등 사회요직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학생운동이  여러 갈래의 길로 갈라졌듯이 이들이 걸어온 사회동화의 길도 매우 다양한 모습이다. 변호사의 딸로서 사회학, 심리학을 전공한 후 여성운동에 참여하면서 남학생들이 주도하던 사회주의 학생회(SDS)에 반기를 들었고, 프랑크프르트 대학 사회연구소에서 활약하던 아도르노 교수에게 계란 세례를 퍼부었던 한  여학생은 ‘아도르노 교수는 당시 매우 당황하며 절망적인 상태를 겪었다고 한다.’ 자동차 공장 노동자를 거쳐 지금은 시에서 경영하는 여성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가장 평범한 사회진출의 경우이다. 법학을 전공하고 현재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68세대 투사,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고 모택동의 영접을 받기도 했던 녹색당 시의원, 부동산업계에서 직장을 구했다가 우연한 기회에 거부가 되어 구 동독의 유명 출판사를 인수한 경영인도  있다. 정계에 진출한 인사들의 숫자는 엄청나다. 이 중에는  녹색당 창당 시부터 활약해온 인사들이 많지만 좀 더 온건한 길을 택한 사민당 인사들의 활약도 주목을 끈다. Schroeder를  위시하여 현재 사민당소속 주지사는 거의 대부분 68시대에  활약하던 극렬파 출신들이다.
  최근 다시 언론에 오르내리는 인물은 콘-벤디트(Cohn- Bendit)이다. 그는 유대계출신으로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가  생활근거지였다. 프랑스 낭뜨 대학에서 68운동이 처음 터질 때부터 이 대학 주동인물로 활약했고 그 후 독일과 프랑스를  왕래하며 활동무대를 넓혀간 그는 80년대부터 녹색당원으로  정계에 투신하여 프랑크푸르트 시의원, 주정부 장관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그런데 9월 중순 톱 테러리스트로 지명수배 받던 Klein이 프랑스 시골 은둔지에서 체포되자 콘 벤디트는 자신이 계속 그에게 재정지원을 해왔다고 고백했다. 옛 동지로서 충실하게 의리를 지키느라 그렇게 오랫동안 범법행위를 한 데 대한 놀라움은 컸다. 물론 그는  유럽연합의회 의원으로 치외법권의 혜택을 받았으나 기민당측의 공격은 만만치 않다. 현재 독일의회 녹색당 원내총무인 Fischer의 경우에는 80년대 초, 헷센 주 경제장관 암살에 사용된 권총이 그의 승용차로 운반되었다는 사실이 요즘 다시 상기되고 있다. 적군파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현역 정치가들의 근황이다.
  이런 소란의 와중에도 학구파로 남아 현재 학계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수는 약 30명으로 집계된다. 이들보다 사회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 인사들은 진보성향의 언론과 각급 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중견 교사층이다. 이 교사들은 요즘도 “나도 68세대였다.”는 소신과 자부심을 학생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털어놓는다. 그러나 일종의 사회낙오자가 된 과거의 투사들도 적지 않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3년 전 베를린 대학의 집계에 따르면 독문과 학생 중 1400여 명이 10년 이상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고 이중 150명이 45학기 이상 된 68세대의 잔류자로서 마치 대학을 안식처로 삼고 있는 부류인 것으로 판명됐다. 최고 학기 수는 57학기. 그러나 독문과 이외에도 사회과학부에는 훨씬 더 많은 68세대의 은둔생활자가 있으리라고 짐작된다.

  68운동이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68운동의 자취가 오늘날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위에서 보았듯이 관찰자의 시각과 성향에 따라 달리 나올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사회문화적 혁명이 갖는 특성이라 하겠다. 우리의 관심사는 현 한국 상황에 대해 68운동이 무엇을시사하며 여기서 우리가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68운동의 기본방향이 권위주의에 젖은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이었다는 점에 공감할 수 있다. 독일과 한국의 권위주의가 서로 다른 양상을 띠고 있음은 당연하며 그 폐해 역시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권위주의 전통이 서로 다른 근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과거 한국을 엄습했던 IMF 위기를 한국적 권위의식과 연계 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IMF 발생원인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단편적인 이유가 거론되고 있고 위기 극복방안에 대해서도 정경유착 고리의 단절, 기업의 투명성, 사회의 개방성 제고 등으로 초점이 모아졌다. 이러한 사항들은 민주주의와  분리하여 생각될 수 없는 요소라는 점에서 한국의 권위주의가 지금의 경제위기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권력자는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합리적인 사고의 능력을 잃고 하급자는 부정과 무능을 보면서도 하등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 경제계와 정계 모두에 공통적이었다. 경제위기를 진정으로  극복하려면 참된 민주주의 실현이 필수적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물론 역사상 제대로 권위주의를 청산해보지 못한 한국인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간과하기 쉽지만, 민주주의, 개방성, 투명성등과 권위주의는 상호배타적일 수 밖에    없다. 특히 해외교포들의 눈으로 보면 한국사회는 여전히 권위적 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범법자가 전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정부가 나서서 법원에 관용을 요청하고 이것이 법원  판결에 반영되는 일이 최근에도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한국의 실상이다. 삼권분립이니 법 앞의 평등이니 하는 구호는 ‘한국적 민주주의’ 와는 무관한 교과서적 지식에 속한다. 이런 논리를 연장해가면 권력자에게는 무엇이든 허용된다는 결론도 가능하다. 수천억 원을 사유재산으로  은닉하고 있는 전직 대통령의 경우를 보면 이러한 결론이 현실임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끊임없이 ‘의식개혁’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그러나 독일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독일에서는 68운동과 같은 대규모의 사회문화적 혁명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필요할 때마다 유행어처럼 나오는 한국의 구호식 의식개혁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구태의연한 의식개혁 구호가 앞서는 의식개혁이란 현실적으로 실현시킬  수도 없는 강박에 불과하다. 현재 정부에서는 다시 ‘탈권위’ 를 총체적 국정개혁 6대 과제에 포함시켰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경제위기 극복과 직결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의식개혁’ 이라는 과제를 실현하는 데 무엇보다 탈권위가 일차적 목표로 설정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유럽리포트*1998년]

  2. 독일의 애국논쟁(Patriotismus-Debatte)

  일반적으로 유럽인이나 미국인에게 ‘자기 조국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거의 누구나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답변할 것이다.
  독일인의 경우만은 예외적이다. 여당인 기민당(CDU) 총무의 말 ‘Ich bin stolz, ein Deutscher zu sein.(나는 독일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때문에 독일에는 한바탕 ‘애국논쟁’이 벌어졌다. 그 출발점은 이 발언내용에 대해 개인적으로 모욕적인 발언을 아끼지 않으며 거센 반발을 보인 녹색당 출신 환경부장관 Trittin이었다. 그는 기민당 총무는 스킨헤드의 정신  상태를 가졌다. 외모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독일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했는데 이는 이 나라의 인종주의자 깡패집단에서나 볼 수 있는 정신적인 저공비행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Er hat die Mentalitaet eines Skinheads und nicht nur das Aussehen. Das ist so eine Flachheit, der geistige Tiefflug, der jeden rassistischen Schlaeger in dieser Republik auszeichnet).  스킨헤드는 삭발족. 즉 머리 위에 아무것도 없듯이 마찬가지로 머릿속에도 든 것이 없다는 것이 스킨헤드의 정확한 정의(Definition)이다.
  트리틴의 표현이 외모까지 들먹여 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계기로 또다시 애국, 민족적 자긍심(Nationalstolz)등의 문제가 쟁점화 되며 광범위한 사회적 토론이 벌어졌다. 독일 정계에서는 원래 자신을 나치와 비교한다는 것은 가장 큰 모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트리틴의 논평에 대해 수긍할 점이  있다는 것은 실제로 ‘독일인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표어는 나치들이 즐겨 쓰는 표어이기 때문이다.
  이때는 마침 피셔 외무장관 사건이 채 아물기도 전이라 트리틴 장관에게도 사퇴를 요구하는 야당의 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독일인 30%만이 민족적 자부심 가져

  독일인의 민족적 자부심은 나치 정신상태와 동일시해야 하는 것일까? 다른 유럽국가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독일에 대해서는 독일인은 누구나 혐오해야 할 이유가 없다. 독일의 법치국가제도, 헌법, 확고하게 다져진 민주주의제도 등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더  작은 문제에 대해서도 자랑스러워 할 수 있다. 통일을 이룬  성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이제 겨우 한 세대가 지난, 2차 대전까지의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청산작업이 역사의식에서 단절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논쟁에 라우 대통령도 참여했다. 그의 해석은 독특했다. 그는 ‘우리가 독일인이라는 데 대해 기쁘게 생각하거나 감사하게 생각할 수는 있어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부심이란 나 스스로가 성취한 것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라는 해석을 가한 것이다. 이에 대해 기민당에서는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적격자가 못  된다.’ 면서 반론을 가했지만 라우 대통령은 항시 국가를 사랑하는 시민으로서 민족주의에 치우치지 않는 정치가이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 대해 누구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향과 조국을 사랑하며 잊지 못한다. 그러나 사랑과 자부심이라는 두 감정은 역시 서로 다른 근원에서 싹트는 감정일 것이다. 내가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은 나의 자의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다. 나의 의사와 무관하게 나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은 대상에 대해 내가 자부심을 가질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어떤 대상을 사랑하면서도 자부심은 거부할 수 있다’는 라우 대통령의 논평에 대해 더 가깝게 느껴진다.
  독일 언론은 이번 논쟁을 계기로 성인시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를 보면 자부심을 느낀다고 답을 한 시민은 전체의30% -연령이 높을수록 비율이 높다. 60세 이상은 45%, 29세까지는 8%- 이다. 독일인이라는데 대해  기쁘게 생각하지만 자부심은 느끼지 않는다는 층이 40% -전체적으로 가장 많은 비율이다. 독일인이라는 게 알려지면 불쾌하다는  층이 24세까지 9%- 기타 연령층은 2%, 그 외 시민은 이 문제에 ‘관심 없다’라고 답변했다.  [유럽리포트*2000년]

  3. 역사상에 기록된 반 외국인 감정

  19세기 중반 미국 Baltimore의 종교 계통 일간지들은 당시 독일에서 1848년 혁명이 실패한 후 미국으로 이주해온 이민자들을 ‘Heine의 무정부주의자 학교 졸업생’이라 칭하고 이들이 성경공부에 반대하여 사고의 자유를 주장한다는 등의 이유로 이들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또한 극우파 정당에서는 반 외국인 감정을 선동하여 주 의회 선거에서 단숨에 6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정당 목표(Ziel)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제대로 답변을 못했기 때문에 “Know-Nothing”라는 별명이 붙었었다.  이 정당은 또한 테러집단을 조직, 자주 폭력사건을 일으켰는데 1855년에는 독일인이 많이 살고 있던 Kentucky주에서 독일인 23명이 살해되고 수백 명이 부상당하는 폭력사건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 극우파 정당은 노예제도를 지지하고 나섰으므로 그 후  영향력을 잃고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반 외국인 감정이 요즘은 교육수준이 낮은 사회 문제아들에게 주로 일고 있으나 과거에는 대사상가들이 극단적인 반외국인 감정에 휩싸여 있었음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라 하겠다.  18세기 독일의 비판정신을 대표하는 Imanuel Kant는 미국 원주민을 거칠고 야만적이고 게으르며 정감(Affekt)과 정념(열정 : Leidenschaft)이 부족하므로 충동력이 없다는 등 매우  모욕적인 평을 가하고 있다. (Affekt와 Leidenschaft : 일반적으로 L.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감정, 즉 소유욕, 질투, 증오 등, A.는 순간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감정, 즉 공포, 희로애락 등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18세기 프랑스 계몽기의 자유사상가인 Voltaire 역시 인간의 외모가 내면적인 도덕성을 지배한다는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중국인, 인도, 페르시아인 등에 대해서는 때로는 호의적인 면을 보이면서도 근본적으로 바다 건너 인종에 대한 불신감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아프리카 인에 대해 그는 “양털 같은 머리카락을 한 검은 동물”이라고 장난이 뒤섞인 혹평을 가하기도 했다.  [유럽리포트*2000년]

  4. 학계를 조롱하는 학술논문

 『Eine transformative Hermeneutik der Quantengravitation』- 이 제목을 붙인 학술논문은 수년 전 사회학 계통 전문 학술지에 실렸었다. 철학과 물리학의 개념들이 뒤섞인 이 제목을  보면 아무도 이 논문의 높은 학문적 수준과 전문성에 대해  의심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문 학술지에 선발되어  게재됐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한 물리학자가 투고한 이 논문의 내용이란 실제로는 아무런 학문적 의미도 없고 단지 학계에서 유행하는 전문단어와 개념들을 나열해 그럴듯한 문장으로 독자들을 현혹시킨 데 불과한 것이었다. 이 장난기 섞인 논문의 집필자는 Sokal이라는 뉴욕대학의 한 물리학자였다. 이 해학적인 저자의 의도가 세상에 공표되자 학계에서 큰 웃음거리가 된 것은 당연하다. 화제 거리가 된 데는 역시 필자가 사회학자가 아니고 전혀  분야가 다른 문외한이라 할 수 있는 물리학자였다는 사실이 더 크게 작용한 때문이다. 내용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비 학자가 전문학계를 우롱했다는 사실이 조소거리가 된 것이다.
  필자는 그 후에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적 사기’ 라는 표제를 한 서적을 출판하기도 했다.
  놀라운 것은 여기서 1990년대 소위 포스트모던이즘을 대표할 9명의 학자들이 마치 소칼이 오용한 것과 동일한 수법으로 자연과학분야의 개념을 이용한 사례를 분석했다.
  이 논문 필자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관련성을 찾아볼 수  없는 자연과학 개념을 정신과학, 사회과학 논문에 인용함으로써 설익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추측컨대 저자들은 자연과학의 개념과 연계시킴으로써 자기 논문에 과학적 정확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라고 생각되며 동시에 자신의 오류를 아무도 발견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논문에 과연 어느 정도의 신뢰성을 가질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학술논문에 흔히 나타나는‘난해성’에 대해 새로운 인식과 통찰을 요한다  하겠다.

  또 하나의 논문
  그 후 6년이 지난 몇달 전 발생한 유사한 사건은 위의 물리학자의 행태에 대한 일종의 보복행위로 보이기도 한다. 문제의 인물들은 프랑스 TV에서 과학부 기자로 활약하는 쌍둥이 형제들이었다. 소련 귀족가문 출신인 이들은 스스로 자신있게 ‘나는 천재’ 라고 할 정도로 특출한 인물들이다. 세 살 때 피아노를 치고 여섯 살에 자동차 운전을 했으며, 14세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6세에는 비행사 자격증을 얻어냈다고 한다. 그간  저술가로서도 활약했다.  전공자가 아닌 이들이 발표한 논문은 이론물리학분야의 논문이다. 더욱 웃음거리가 된 것은 이들 형제가 이번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더욱 철저히 지도하고 심사해야 하는 학위 지도교수나 심사의원도 이 논문의 허구성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이 다룬 문제는 소위 ‘선 이론(String theory)’이다. ‘우주탄생 이전의 시간’에 대한 수학적 서술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추상인지 공상과학인지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한 도전임에 틀림없다. 우주생성을 다루는 이 이론은 실험적으로 검증이 불가능하므로 수학과 논리에만 근거한 이론이다. 논리에서 도출해낸 이론이 현실세계와 일치하는가를 확인한다. 여기서는 물리학이 순수 정신과학과 같은 선상에 있으며, 각종 개념과 용어는 연구자 자신들조차 혼돈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따라서 이 분야는 학문에 대한 수용성이  감소하고 연구비 조달이 어려워지며 전공희망자도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사이비 학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허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론물리학이 아이러니한 학문이라는 주장에 대한 훌륭한 본보기를 남겨준 셈이다.  [유럽리포트*2000년]

  5. 영국인이 보는 지옥

  영국인이 뜻하는 지옥이란, 독일인이 경찰관을 하고, 스웨덴인이 익살꾸러기 짓을 하며, 이탈리아인이 군인이며, 이스라엘인이 외교관이고, 아일랜드인이 식당 서비스를 하며,  벨기에인이 Popsong을 부르고, 프랑스인이 도로보수 일을 하며, 터키인이 요리를 하고, 상용어는 물론 네덜란드어인 그런 곳이다.  즉 영국인의 지옥이란 영국인만을 제외하고 나머지 유럽 각국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London에 나붙는 영국의 구주공동체(EU) 가입을 반대하는 선전 문구이다.
[유럽리포트*1999년]

  6. 여권신장으로 변해가는 독어

  독어는 여권운동가에게 훌륭한 활동자료를 제공하는 언어다. 독어명사 뒤에‘in’을 붙이면 여성을 칭하는 단어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불씨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말로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이라고 하면 이 ‘시민’은  남성만을 칭하는 것이며 여성은 시민에서 제외되었다는 독어 특유의 의미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가가 연설을 할 때도 ‘여성시민과 남성시민여러분! (Liebe 'Mitbuergerinnen und Mitbuerger!)’이라고 해야 한다. 이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도 없다. 우선 모든 것을 간단히 신속하게 해결해야 하는  현대적 시대의식에도 역행되는 것이다.
  여기서 타협안으로 나타난 처방이 남성, 여성이 동일한 복수형을 갖는 단어를 사용하여 에러 발생을 원천봉쇄 하는 것이다. 본 사이트에 소개한 Student의 복수와 Studetin의 복수형이 같은 형태를 갖는 단어인 ‘Studierenden(학습하는 사람들)’이란 단어로 ‘Student(in)’을 대치한 것이 좋은 예이다. 이와 같이  복수를 이용하는 방법은 독일에서 명사의 ‘성 (Artikel)’이 불확실할 때 흔히 사용하는 처세술에 속한다.
  이번에 여권과 언어문제를 놓고 고민하던 Leipzig 대학에서 코미디에 가까운 제안이 나와 언론에 보도되었다. 문법적 오류를 범하면서까지 문제해결에 접근하려는 대안이다.
  정상적으로는 남성교수는 ‘Herr Professor’, 여성교수는 ‘Frau Professorin’라고 부른다. 그런데 남녀교수가 한 자리에 있을 때는 물론 이 두 문장을 연속해야 하는 불편이 크다.  이를 덜기 위해 두 단어를 융합하자는 안이 대학에서 통과되었다. 결과는 ‘Herr Professorin’이 창안된 것이다. 남녀교수를  모두 지칭한다지만 문법적으로는 앞뒤가 모순된다. 그러면서도 현실적으로 이 용법이 일상에서 통용되리라고 보는 대학 내  관계자는 없었다. 심지어 Duden 사전 편집장도 이 용법을 수용하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최근 BASF 사에서는 직원들 간에 이름 앞 ‘Herr Dr.’ 라는 호칭을 없애기로 했다. 거추장스러운 권위의식에서 유래된  유물을 털어버린 것이다. 독일 대학에서도 교수 학생 간에 Vorname만으로 통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독재시대를 거친 독일사회에서 ‘탈권위’ 운동이 벌어진 것이 1968년의 ‘68 운동’ 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근원적인 의식전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학에서 이렇게 하찮은 문제를 놓고 고민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름 앞에 교수라는 직업을 표시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데는 고민한 흔적이  전혀 없다.  [유럽리포트*2003년]

 7. 호텔에서 나타나는 국민성

  지난 7월 독일관광업계에서 여행객을 대상으로 행한 설문조사가 발표되었다. 질문은 어떤 나라 국민이 여행객으로서 가장 인기가 있나 하는 내용이었는데 1위는 일본인, 2위는 독일인으로 나타났다. 평가기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이 두 국민은 조용한 분위기를 즐기며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질서의식이 강하다는 점에서 크게 유사한 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위에서 보건대 여러 국민성의 차이점을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직종이 여행 가이드, 호텔업, 식당 등일 것이다. 일상생활의 주변에서 구체적이며 사소한 국민성의 차이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한국인들은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하는 데 비해 너무 관심이 적다. 뒤로 떨어져 담배를 피운다든가 서로 잡담을 나누는 경우도 많다
이에 비해 일본인들은 극히 대조적이라고 한다. 이들은 마치 초등학생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자세로 열심히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이것이 관광지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기도 하겠지만 이에 못지않게 가이드에 대한 예의의 표시로 볼 수 있다.  레스토랑 역시 여러 국민성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예를 들어 10명의 단체관광객이 식사를 한다면 주방에서 이 음식을 동시에 준비해서 내올 수 없다. 한국 관광객은 이때 음식을 받은 쪽에서부터 먼저 식사를 시작하여 나중 테이블에서는 부족해진 밑반찬을 더 신청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인이나 독일인의 경우 모두가 음식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 함께 식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가이드에게 조용히 부탁한다.  식당 내에서 한국 아이들의 행동은 이곳 한인사회에서도  항시 화제 거리가 된다. 아이들이라고 식당에서 마음대로 뛰어 다니는 자유를 허용하는 나라는 한국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독일인의 가정교육을 보면 어릴 때부터 아이들이 해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을 이해시키는 것이 주요 핵심이다. 그리고 이는 부모의 일방적인 ‘나인(Nein)’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시키려고 애쓴다. 이 과정이야말로 아이들에게 사고의 영속성을 훈련시키는 첫 단계  교육이 아닐까.  아이들에게 기죽인다고 자유방임을 택하는 한국식 가정교육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호텔에서도 한국인과 독일인의 차이가 뚜렷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일단 놀라움을 자아내게 한다. 예를 들면 한국인과  독일인이 자고 나간 방을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한다.  독일인의 방은 마치 군대에서나 보듯이 잘 정돈되어 있다. 이부자리는 물론 심지어 세면대나 샤워장도 수건으로 닦아  놓고 나간다.
  한국인의 방은 세면대에서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다. 우선 방안의 전기는 대부분 그대로 켜져 있고 난방 스팀은 필요  이상으로 가장 크게 켜놓고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한국 민박수준의 숙박을 이용하는 독일인들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주로 건설공사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라는 사실이 놀라움을 자아내게 한다.  여기 소개하는 관광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한국인은 한국적 특성으로 하나 같이 자기중심적이며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의식을 꼽는다. 그리고 이는 가정교육의 부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가정교육이란 도덕교과서에 나오는 미사여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중심을 이끌어  가는 기본적인 가치가 유지돼야 한다. 아무리 법을 만들어  놓고도 억지를 쓰면 억지가 법이 되는 기현상으로 인해 식당은 아이들의 운동장으로 변해버린다.  지난 주 프랑스 북부 소도시에서 교사가 초등학생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발생해서 사회가 시끄러웠다. 정돈을 요구하는 교사와 옥신각신하다가 욕이 나오고 뺨을 때린 것이다. 이는 20년 전부터 금지된 사항이다. 법원에서는 900유로 벌금형을 내렸지만 사회분위기는 다르다. 긴급 설문조사에 의하면 80% 이상의 시민이 교사의 편을 들었고 수만 명이 교사를 지지하는 사인을 했다. 문부성은 앞으로 구체적인 체벌방법을 규정한  지침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유럽인들도 국적에 따라 차이가 나타날까? 악명 높은 영국 훌리건은 요즘 여름 휴가철을 맞아 그리스 관광지를 휩쓸며  음주와 소란으로 나라가 고민에 빠져있다. 1년 전보다도 30% 증가한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국신사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국제적인 체인호텔에서 손님들의 습성을 조사한 결과가    있다. 물론 여기에는 동양인에게서 보는 현격한 차이점이 나타나지 않지만 국민성의 차이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 결과를 보면 호텔에서 크림이나 샴푸를 집어 가는 것이 보통 있는 일인데 독일인, 스페인인, 이태리인의 25%가 이런 습관이 있다고 한다. 슬리퍼를 집어가는 것은 더 흔하지만  이는 또 호텔이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벌어진 가장 큰 사건은 역시 중국인이었는데 그는 호텔의 고급 양탄자의 일부를 잘라서 갖고 가는 대담성을 보였다.  이태리인은 호텔방에서 세탁을 하는 국민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여행기간이 긴 사람이 세탁을 한다지만 이태리인은 아예 집에서 갖고 온 빨래를 해치운다. 그래도 적어도 식사만은  식당에 가서 한다. 반대로 독일인, 영국인, 스페인인은 먹을 것을 사서 방안에서 먹는 절약형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진 국민이 네덜란드인. 실리적인 국민이라는 이들은 관광지에 대해서는 무관심. W-LAN, 미니바, 침대 종류에 관심이 집중된다. 그리고 더불룸에 투숙하는 부부의 25%는 분리된 침대를 고집한다.  그리고 이태리인은 목욕실에 걸려 있는 가운을 집어가기로 유명하다.    [유럽리포트*2006년]
  8. 혁명은 무엇을 바꿀 수 있나?

  인간의 조상이라는 직립원인 Homo Erectus에 빗대 지어낸 해학적인 개념으로 Homo Sovieticus를 도입한 인물은 소련  반체제 철학자 시노비에프였다. 정치체제의 변천과정에서 소련혁명 후 소비에트 사회라는 특수 환경에서 태동된 ‘특수 인간형’의 존재를 지목한 것이다.
  즉 Homo Sovieticus란 공산주의 하에서 부정적으로 변화되어간 사회현상을 빗대서 창조한 개념이다. 러시아 사회에서  직장인은 책임감, 창의성은 물론 의욕상실증에 걸려 있었고,  국가재산이란 주인이 없는 물건이므로 공장 생산품을 개인이 내다 팔기도 하는 정도로 무질서하고 나태한 사회였는데 이로 인해 국가경제는 만성적인 침체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공산권이 멸망한 후 동구권학자들은 이 ‘소비에트 인간형’ 개념을 동구권 내 포스트커뮤니즘 사회에 나타난 부조리와  연계시켜 이의 요인을 해석하려고 했다. 즉 이 소비에트 인간형이 잔재해 있는 것이 공산권 멸망 후에도 민주주의 발전,  시장경제 발전에 방해 요소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Homo Sovieticus를 논할 당시 사회 부조리는 정치경제 체제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점이다.
  이와 대비하여 공산권 멸망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유럽국가들의 사회상을 좀 더 상세히 볼 필요가 있는데, 즉 수십 년의 독재가 무너지는 순간 Homo Sovietcus는 색다른 형태로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질서가 붕괴되면서 권력의 공백을 채운 세력이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공산정권 하에서도 국가권력의 요직에 있던 부류들이었다. 즉 정권의 엘리트로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무장되어 온 핵심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사상적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온 혁명가들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인간다운 사회의 건설을 이상향으로 삼아온 인간형이다.
  그런데 정권 몰락 이후 이들의 행각, 이들이 남겨놓은 사회는 너무나 비참했다. 사회 각계는 일찍이 없던 부정부패와  권력남용, 약자에 대한 착취, 인권유린 등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의 갖가지 혐오스러운 형태의 악을 출현시켰다. 마치 야수와 같은 자본주의의 근성을 부활시키는 모습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러한 비리행각이 동독을 제외한 모든 동구권국가에서 동일한 양태로 벌어졌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최근 EU는 불가리아와 루마니아가 EU에 가입하면서 지원받아야 할 지역개발비 지급을 거부했는데 이유는 국가운영이 흔들릴 정도로 부패가 번져있다는 것이다. 국가가 통째로 악의 도가니 속이었으니 이는 전례 없는 놀라운 사건이다.
  루마니아에서 요즘 독일로 원정을 오는 범죄꾼들은 공산권 붕괴 후 무서운 체험을 겪은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문자 그대로 주거지였던 도시 하수구에서 살아남은 사회계층이다.
동구권의 몰락은 이상향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러시아에서 70년, 동유럽에서 40여 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하고 이 인간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거대한 이상이 거품으로 꺼져가는 순간이었다.
  모든 혁명 특히 좌파혁명이 보여주듯이 러시아혁명 초기의 낙관적인 분위기는 가히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사회  경제체제의 개혁은 당연하지만 사회변혁의 기본 틀이 되는  인간형 즉 인간의 본성을 완벽하게 변혁시킬 수 있다는 확신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착취에서 해방되는 사회주의가 탄생시키는 새로운 ‘초인간(Uebermensch)’ 은 거짓과 사기, 게으름, 절도, 과음, 잔인성에서 해방된 이상적인 인간형을 만들 수 있다고 기대했다.
  트로츠키(Trotzki : 공산주의자로 레닌과동시대에 활동했으나 레닌, 스탈린과의 불화로 남미로 망명. 1940년 스탈린 비밀경찰에 암살됨)의 예언은 가장 자신감에 찬 내용이었다. 그는  공산주의 사회의 인간은 더욱 강하고 현명하고 고상하게 됨으로써 평균적인 인간형은 아리스토텔레스, 괴테, 마르크스와  같은 수준의 인간일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Homo Sovieticus는 지나간 40년과 80년에 걸쳐 존립했던 공산주의 사회를 빗대서 창출된 개념이지만 공산권 몰락 후  나타난 사회주의 사회의 참모습을 볼 때 Homo Sovieticus와 현재 나타나고 있는 동유럽의 인간상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지나간 40년, 80년간 인간은 트로츠키가 꿈꾸던 이상적인 인간형에서 멀어져갔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잔인성이 뚜렷한  원초적인 인간형으로 되돌아갔다.
 ‘야수적인 자본주의’의 본성이 바로 이들 국가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40년간 인간개조를 위한 혁명이 낳은 결과이다.
  독일사회에 떠도는 마르크스의 어구가 있다. ‘혁명은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변화시킬 수 없다. (Die Revolution kann alles aendern, bloss die Menschen nicht.)’
  마르크스의 말이라고 알려진 이 어구가 실제로 그의 말인지는 아직 누구도 확인하지 못했다. 단지 그가 현 사회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의 입에서 기대 할 수 있는 첫마디가 될 것이라는 확신에서 누군가가 꾸며낸 어구인 듯하다.  [유럽리포트*2008년]

 9. 인간을 게으르게 만드는 사회보장제도

  독일 사회보장제도가 우수하다는 것은 아마도 krankfeiern (‘꾀병으로 논다’는 전문용어) 제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규정은 독일에만 있는 편리한 제도이다. 직장인은 몸이 아플 때 아침에 전화기를 들고 ‘오늘 몸이 아파서 못 나간다’고 한 마디만 던지면 된다. 3일까지는 의사의 병가증명도 필요 없고 봉급도 100% 다 보장되어 있다. 3일 이상이 될 때는  의사진단을 첨가해야 한다.  이야말로 천국 같은 인간적인 제도라고 볼 수도 있고 인간을 게으르게 만드는 근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게다가 의사와  개인적으로 통하고 눈감아 주면 병가를 더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6주간 이렇게 지나면 그 후에는 직장에서 나오던 봉급이 끊기고 의료보험사에서 일정 퍼센트의 봉급이 나오는데 1년 6개월간 계속된다.  이런 제도가 기업주에게는‘눈에 가시’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직장인은 직장의 눈치를 잘 보아가며 이용을 해야 하는데 주로 영향을 주는 요건은 일반 경제상황이다. 경기가 좋아 기업에서 퇴출될 염려가 적을 때는 가짜 병가는 늘어나고 경제가 나쁘면 병가는 줄어든다. 이에 대한 해석도 기업인과 노조는 정반대이다. 노조는 ‘경기가 나쁠때면 직장인은 아픈 몸을 끌고 직장에 나가는 것’이라고 정반대의 해석을 한다.  그간 이 제도를 악용하는 경우도 많이 알려졌지만 기업에서는 사설탐정을 동원해서 뒷조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병가를 내고 그 동안 자기 고향나라에 가서 자기 살 집을 짓고 있던 유명한 사건이 있었다.  통계에 따르면 독일인 30%가 평균 1년에 한 번 가짜 병가를 받는다. 기업인협회는 가짜 병가로 인한 기업의 손실은 5억 ~ 10억 유로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최근에도 독일에서 조기은퇴를 한 교사가 12년간 스위스에서 교사를 하다 발각된 일이 있었다. 그가 전문의에게 받은  병명은 학교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신경쇠약증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변명은 독일 교육제도로 인해 병의  원인이 된 것이고 스위스학교의 제도는 매우 좋다는 것이 이유였다.    인터넷에는 krankfeiern을 이용하는 안내문이 있다. 적당한 의사를 구하는 첫 조건은 우선 의사의 정치성향을 보아 보수적 성향이면 피해야 한다며 녹색당이나 사민당에 가까운 의사를 추천한다.  또 환자가 많은 의사가 좋다. 시간이 없어 자세히 따질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염, 편두통, 위장 염증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소개되어 있다.  더 훌륭한 정보를 제공하는 무정부주의자(Anarchist) 들이 운영하는 사이트는 10여 가지 병명과 요령을 상세히 안내해주고 있다. 그러나 앞에는 사기목적으로 (Sozialbetrug) 이용하면 엄한 처벌을 받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지만 이들의 생활신조는‘건강하게 일을 하느니 krankfeiern하겠다. (Lieber krank feiern als gesund schuften!)’라는 것이다.  현재 독일에서 이 제도를 잘 이용하는 직장은 공무원, 교사 등이 가장 많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건강상 이유로 조기은퇴가 가장 많은 직장이었다.  최근 한 언론이 독일 내 몇 개 도시에서 개업의들을 테스트 했다. 의사들이 krankfeiern에 얼마나 협조적인가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1. 여의사가 가짜 환자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아픈 데는 없지만 일하고 싶지 않으니 병가(Krankschreibung)를 써주세요.” “형식상(pro Forma)진찰할까요?” “됐습니다.” “나는 보통 이런 것은 안 하는데 봐주는 겁니다. (Das ist ein Gefallen).  진짜 아프면 다시 오시겠지요?”
  2. “어디가 아프시죠?” 한 시간 기다리다 들어가자 의사가 물었다. "아픈 데는 없는데 병가가 필요하네요. 일하고 싶지도 않고, 아이들이 방학인데 아이들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이해 합니다. 휴일이 금년에는 불리하지요. 설사라고 쓰겠습니다.”그리고 1주일 병가를 받았다. 의사의 좋은 조언도 받았다. 설사병으로는 아이들과 외출해도 된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 만나면 지금 의사에게 가는 중이라고 하세요.”
  3. 직접 연말까지 4일간 병가를 써달라고 요구했다. “아픈 데가 없단 말이죠?” “없는데 일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사무실에 일도 많지 않고 해커협회 회의가 있어 가려고 합니다.”  “무슨 약을 먹고 있나요?” “아니요. 완전히 건강합니다.” 병가증을 받고 물어보았다. “제 병명이 무엇이죠?” “급성 과로증  스트레스입니다. 이건 아무 때고 써도 됩니다.”  파리에 여행을 가는데 휴가증을 미쳐 못 냈다고 내과에서  2일 휴가를 받은 사기성 환자, 비슷한 이유로 유행성 기침, burn out 증세, 유행성위장병 등을 병가를 받아내기도 했다. 베를린의 단 한 명의 여의사가 원칙적으로 가짜 증명은      안된다며 거절했다. 그는 이번 주 벌써 여러 명이 이런 부탁을 했다고 투덜거렸다. 8명의 의사 중 한 명이 거절한 것이다.  이런 비리가 발각되면 기업이 의사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고 의료보험사와의 계약이 폐기될 수도 있다. 법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설사가 심하다고 해도 진단 방법이 없으니 무용지물인 법안이다.  [유럽리포트*2009]
  10. 전쟁의 파라독스

  독일은 헌법에 의해, 공격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 참여가  금지되어 있다. 이에 위반하는 경우 무기징역에 처한다고 성문화되어 있다.
  그런 독일군이 민간인을 살해했다. 법적으로 전쟁참여가  불법화됨으로써 사실상 공격전이 금지된 나라 독일이 군대를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한 후 문제가 더욱 복잡하게 얽혀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명백한 전투지역 즉 전쟁을 치르고 있는  지역이다. 따라서 독일군은 평화적 재건이나 치안유지를 위해 경찰 훈련 등에 주목적을 두고 있으며 적극적인 군사작전을  피한 방어적 성격을 띤 것이 독일군의 사명이었으며 국회에서도 이런 조건하에 아프가니스탄 파병 동의를 얻어 냈다.
 ‘살인사건’의 발단은 11월 초. 독일군 부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첩보가 전달되었다. 휘발유를 적재한 열차를 탈레반이 납치하여 독일군 본부가 있는 지역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폭을 시도하려는 폭탄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독일군 작전부는 곧 미국 공군과 연락을 취해 이 열차에 대한 폭격을 요구했다. 미군 장교는 처음에는 폭격에 신중을 기할 것을  주장했으나 결국 독일 측 의견에 따라  폭격을 가했다.
  이 폭격으로 탈레반 수십 명이 살해되었고 그 밖에도 민간인 40여 명이 사망함으로써 독일의 전쟁 논쟁은 다시 격화되는 요인이 되었다.
  구텐베르그 국방장관은 처음 사건이 발생했을 때 독일군  책임장교의 입장을 옹호했다. 정당한 군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건 전말이 차츰 밝혀지면서 입장을 바꿨다. 그 이유는 초기에 국방부 감사위원과 독일군 대대장 클라인이 주요  서류를 장관에게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둘 다  파면되었다. 클라인 대위는 차츰 거센 반발로 나섰다. 그가  폭격명령을 했을 때 어느 정도 민간인의 희생을 감안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전쟁상태에서나 있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가 반박하는 핵심은 폭격으로 인해 오히려 더 큰 재앙을 방지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었다. 또한 폭격은  납치된 열차에만 국한하도록 미군 조종사에 지시했으며 위험지역 외곽에 있거나 이 장소를 피하려는 민간인이나 차량에 대해서는 무력사용을 금지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공격명령을  가한 것은 우군의 위험을 미리 제거하려는데 목적이 있었으며, 아프가니스탄 재건을 반대하는 적군만을 공격대상에 포함시키려 했다고 주장했다.
  ‘눈감고 아웅’하는 식의 변명으로 보이지만 법의 저촉을  피해가기 위한 클라인 대위의 노력이 엿보인다.
  클라인 대위에 대해서는 현재 검찰이 국제형사법에 위배했는지 여부를 조사 중이라는 사실 역시 이 사건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야기되는 문제의 초점, 즉 독일의 입장과 고민을  요약해 보면 이번 폭격이 살해를 목적으로 하는 공격이었는가, 독일은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상태에 있는 것인가 등에 대한 해답을 구함으로써 참전의 합법성 여부를 캐려는 것이다.
  마치 전쟁 놀이터 게임을 보는듯한 이 사건의 배후에는    한 치라도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준법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국방장관은 현 상황은 전쟁이 아닌 ‘전쟁과 유사한 (kriegsaehnlich)  상황’이라고 정의를 내려 아프가니스탄 참전을 합당화하고  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적 특징을 고려할 때 서구적 민주주의가 적합한 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온건파 탈레반에 대해 인권을 존중한다는 전제하에 정권에 참여시키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리포트*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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